지금 학교는 성장 중
놀다, 배우다, 성장하다
서울 청덕초등학교
북한산국립공원이 가까운 서울 정릉동의 청덕초등학교. 평범해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놀이터를 떠올리게 하는 시설과 실내 장식에서부터 이 학교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읽힌다. 즐겁게 놀면서 읽기와 셈을 배우는 수업 시간에는 소외되는 아이가 없다. 집보다 학교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부장 선생님의 이야기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수업 방식과 공간의 변화는 아이들을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만들고 있다.
나만의 공책에 무엇을 채울까
서울청덕초등학교 아이들은 2학년이 되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꿈 키움 공책’을 선물 받는다. 스스로 학습 주제를 정하고 공부한 내용을 기록하는 공책이다.
학교 텃밭에 심은 상추가 어떻게 자라는지 관찰 일기를 써도 되고 통합 교과 시간에 배운 전래놀이 방법을 정리해도 좋다. 마지막 장까지 모두 채우면 교장선생님께 가져가 새 공책과 교환한다. 6학년을 마칠 때까지 몇 권의 공책을 쓸지는 온전히 아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
교장선생님은 누가, 언제 공책을 가져왔는지 정리하고 파악하지만 많이 쓰거나 적게 쓰는 것으로 아이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평가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책의 빈 공간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공책의 빈 공간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지식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필요한 배움을 찾아 채우는 과정이
담긴다.
▲ 창덕초등학교는 교육과정 재구성을 통해 1, 2학년의 학습량을 최소화하고 학생주도적인 놀이 중심 수업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울청덕초등학교는 서울시교육청의 ‘안성맞춤 교육과정’ 시범 학교로서 1, 2학년 학생들의 성장과 발달에 맞는 맞춤식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기초 한글과 수학을 책임지는 동시에, 학교생활 적응기에 충분히 놀면서 배움의 재미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놀이 중심, 학생 중심의 교육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숫자랑 친해지기, 저학년 수학의 첫 번째 목표
수학의 경우 개개인의 성장과 발달 정도에 맞게 학습할 수 있도록 놀이 연계 수학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수학 수업을 앞둔 1학년 1반 교실은 책상 배치를 바꾸고 여러 가지 교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배운 1부터 50까지 수세기를 복습하는 시간. 교실 바닥에 숫자들이 적힌 커다란 천을 펼치고 아이들은 그 주위로 둘러앉았다. 제각기 떠들던 아이들도 선생님이 몇 가지 게임을 소개하자 귀를 쫑긋 세웠다. 첫
번째 게임은 무작위로 정해진 숫자를 알아맞히는 업 앤드 다운(Up & Down) 게임. 숫자판을 등지고 주머니를 던진 술래는 그 숫자를 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어떤 숫자인지 추리해야 한다. 제일 먼저 제비 뽑기로 선발된 한 아이가 술래 의자에 앉아 힘껏 공 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가 떨어진 곳에는 95가 적혀 있다. 50보다 큰 숫자가 나왔다는 선생님 말씀에 지훈이는 58을 부르고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업을 외친다. 술래가 짐작한 숫자를 말하고 아이들이 업과 다운을 반복하며 힌트를 주는 동안 정답에 점점 가까워진다. 50이 넘는 숫자는 아직 모르는 듯한 아이들도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게임에 참여한다.
33, 34, 35를 셀 수 있으니 93, 94, 95를 세는 것도 어렵지 않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게임에 몰입하면서 학습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고 흥미와 의욕은 자연스럽게 성취로 이어진다.
곱셈을 익히는 여러 가지 방법
곱셈을 배우기 시작한 2학년 2반도 주사위와 바둑돌로 재미있는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숫자들만큼 바둑돌을 묶어 세는 게임이다. 두 명씩 나와서 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세는지 겨루는 방식으로 모든 아이에게 한 번씩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자리에서 지켜보는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시합 결과를 판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네 개씩 다섯 묶음을 만든 친구나 다섯 개씩 네 묶음을 만든 친구 모두 20이라는 정답에 도달한다. 아이들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묶어 세기를 해보면서 곱셈의 원리를 깨칠 뿐만 아니라 구구단을 외우면 좀 더 빠르고 쉽게 정답을 맞힐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교사는 이러한 놀이를 위해 수업 내용을 재구성하고 교구를 준비하는 등
수업 준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각 학년의 담임 및 과목 담당 교사들은 학기 초에 수업 계획을 협의하고 학기 중에는 주 1~2회 모여서 수업 지도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활동 중심으로 짜인 교과서를 주로 활용하면서도 활동과 놀이 횟수를 늘리기 위해 더 다양한 아이디어를 개발한다. 게임과 놀이를 소개하는 책을 참고할 때도
있고 여러 학교의 교사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를 통해 수업 경험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기도 한다.
안 하는 듯, 놀이처럼 받아쓰기
놀이 중심으로 수업을 재구성할 때 중요한 것은 놀이의 재미보다도 학습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놀이 중심으로 수업을 재구성할 때 중요한 것은 놀이를 통해 배우는 내용이다. 2학년 담임 이주원 선생님은 “놀이가 재미있고 즐거운가보다는 학습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놀이는 아이들을 즐겁게 하지만, 학부모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학부모가 놀이수업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공부가 부족하진 않을지 우려하는 것이 현실. 숙제가 없으니 아이가 집에 와서 공부를 안 하는 것 같다거나, 받아쓰기를 안 하니 글을 제대로 읽고 쓰는지 걱정된다고 말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
서울 청덕초등학교 역시 이러한 우려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리고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서울시교육청의 ‘안성맞춤 교육과정’ 즉, 1, 2학년 아이들이 사교육과 선행 학습 없이 학교 수업만으로 필요한 학력을 갖출 수 있게 하는 교육을 지향하되 청덕초등학교 현실에 맞춰 재구성해 ‘도담도담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국어 시간에는 숙제와 받아쓰기를 없애는 동시에 한글 읽기와 쓰기 등 기초 교육을 강화했다. 받아쓰기라는 이름으로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시험을 없앴을 뿐 실제로는 좀 더 재미있는 방식으로 맞춤법에 따라 올바르게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더불어교사와 함께하는 국어 시간
창덕초등학교는 기초・기본 교육에 충실하기 위해 국어 교과에서 한 교실에 두 명의 정규 교사가 배치되어 수업하는 더불어교사제를 운영하고 있다.
담임교사와 더불어교사가 국어 수업을 함께 진행하는 2학년 교실을 찾아가 봤다. 발표할 때 주의점 알아보기라는 주제로 모둠활동이 한창이었다. 교실 벽면 곳곳에 열 개의 쪽지가 붙어 있고 쪽지마다 발표할 때의 주의점을 설명한 문장이 하나씩 적혀 있다. 모둠별로 문장 10개가 모두 적힌 종이를 받았는데 문장마다 서너 개의 빈칸이 뚫려
있다. 모둠원들은 쪽지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돌아와 말해 주는 역할과 친구가 말해 준 내용을 듣고 빈칸을 완성하는 역할을 나눠 맡는다.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쪽지에 적힌 내용을 기억해서 전달하는 모둠원의 역할이나 들은 내용을 받아 적는 모둠원의 역할 모두 중요하다. 발표 내용과 자세를 알아보는 교과 활동인 동시에 변형된 형태의 받아쓰기
활동인 셈이다.
더불어교사가 활동을 안내하고 내용을 설명하며 수업을 이끄는 동안 담임선생님은 각 모둠을 돌며 아이들이 활동에 잘 참여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며 지도한다. 서울 청덕초등학교는 올해 2학년 국어 교과에 이처럼 더불어교사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주로 더불어교사가 수업을 주도하고 아이들의 특성을 더 잘 아는 담임교사가 개인별 지도를
맡는다.
한미숙 교감선생님은 “교사 두 명이 수업 내용과 방식을 계속 협의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이 쉽지 않지만, 학업 성취도가 낮은 아이들이나 활동에 참여하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더 밀착해 지도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모든 교과 학습의 바탕이 되는 읽기와 쓰기, 문해력 등 기초 학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어 교과에 더불어교사제를 도입했다”고
설명한다.
학교 텃밭에서 자라는 생명
1학년 3반의 여름 통합 수업에서는 협력교사가 아이들을 함께 지도하고 있었다. 협력교사는 더불어교사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 아이들 지도에 참여한다. 수업 중 아이들 개별 지도부터 중간놀이나 급식 지도까지 협력교사의 역할이 크다. 지난 봄 학교 텃밭에 심은 작물을 수확하기로 한 이날, 교실에 앉아 담임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와중에도
아이들의 마음은 벌써 텃밭으로 달려 가고 있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실내화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건물 입구에 가지런히 정리하도록 지도하는 것도 담임교사 혼자였다면 꽤 벅찼을 것이다.
선생님의 시범을 따라 상추와 고추, 가지를 수확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직접 뜯은 상추를 급식 시간에 먹겠다며 챙기는 아이도 있고 고추는 매워서 먹을 수 없다며 선생님의 바구니에 얌전히 올려놓는 아이도 있다. 학교 텃밭은 아이들에게 밥상에 오르는 모든 음식의 소중함을 가르쳐 준다. 멀리 가지 않아도 학교 안에 텃밭이 있기
때문에 생태 교육은 아이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서울 청덕초등학교가 지향하는 학생 중심의 교육 혁신은 아이들의 신체와 눈높이, 감성을 반영한 학교 공간의 변화까지 포함하고 있다.
아이들의 감성을 닮은 학교 공간
창덕초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느낄 긴장감과 부담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교실 환경 개선, 적응 교육 등을 실시해 안정감 있고 행복한 학교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서울 청덕초등학교는 과거 60개 이상의 학급을 편성할 만큼 규모가 큰 학교였다. 학년당 3~4학급, 총 19개 학급으로 학생 수가 줄면서 다른 학교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여유로운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고, 다양한 놀이와 체험이 가능한 시설들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 사이의 공터에는 학교 텃밭을 조성했고 그 옆으로 전래놀이장을 만들었다.
실내 유휴 교실에는 비 오는 날에도 전래놀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또 다른 전래놀이장을 만들었고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에 안전 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안전체험실도 마련했다. 넓은 복도를 활용해 만든 암벽 놀이터들과 아기자기한 북카페 등은 쉬는 시간이나 중간놀이 시간에 아이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다.
단조로웠던 교실 공간도 달라졌다. 서울 청덕초등학교는 서울교육청의 ‘꿈을 담은 교실’ 프로젝트 대상 학교 중 하나로 선정되어 1, 2학년 6개 학급을 새롭게 단장했다. 교실 뒤편에 늘어서 있던 사물함을 칠판 아래로 옮기고 원래 사물함이 있던 자리에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낙서하고 메모할 수 있는 보드를 설치했다. 아이들이 편하게 앉아
보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깔아 둔 매트는 때때로 발표나 연극 같은 수업의 무대로 변신한다.
꿈을 담은 교실의 여러 변화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교실 안에 생긴 아이들만의 아지트이다. 교실 벽면 일부를 복도 쪽으로 확장해 둥글게 설치한 공간에서 아이들은 안정감을 얻기도 하고 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놀이를 만들기도 한다.
아이, 가족, 공동체의 행복
수업 방식과 공간의 변화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 교사 등 모든 교육 주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아이들의 학습량 부족을 우려했던 부모들은 학교생활을 즐거워하는 자녀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 2학년은 학생 수가 늘었고 입학생 학부모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입학 전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응답한 부모의 비율도 늘었다.
2017년부터 수업과 활동 중심의 교육과정개발을 주도해 온 엄영진 선생님은 “자녀 교육에서 학교를 믿고 보내는 분들이 늘고 있다. 그만큼 교사들의 책임도 커졌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놀이와 활동 중심의 교육과정에서는 시험 같은 형태의 평가가 아니라 과정 중심 평가가 중심이 된다. 특히 저학년은 교사가 수업 중 학생의 반응, 참여도를 지켜보는 것으로 성취도를 판단한다. 서울 청덕초등학교도 처음에는 놀이로 학습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는 교사가 적지 않았다. 지금은 많은 교사가 아이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어도 학년마다 목표한 지점까지는 결국 도달하게 된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창덕초등학교는 아이들이 학교 공간과 선생님들에게 친근함을 느껴 행복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노력하고 있다.
교사들은 모든 아이에게 획일적 기준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창의성과 자기 주도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서울 청덕초등학교는 교육의 변화가 아이들을 좀 더 행복한 존재로 변화시키고 그 아이들이 부모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과정들이 더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의 토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MINI INTERVIEW
“정답보다 엉뚱한 생각을 칭찬합니다”
신주현 서울청덕초등학교 교장
서울 청덕초등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장선생님에게 학교가 넓고 예쁘다는 인사를 전한다. 신주현 교장은 “학교가 예쁜 게 아니라 선생님들 마음이 예쁩니다.”라고 답한다. 근사한 공간만큼 학교가 추구하는 교육의 변화가 가치 있다는 자신감, 그간의 변화를 주도해 온 교사들의 노력에 감사하다는 뜻을 담은 답변이다.
많은 교사에게 놀이와 활동 중심의 수업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더 재미있어 하고 쉽게 참여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신규 교사들도 현실 속에서 좀 더 쉽게 아이들을 통제하고 좀 더 효율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수업에 시나브로 익숙해진다. 그런 통제와 효율에 익숙해진 교사들이 교사로서 충분히 행복할까. 신주현 교장은
“행복하지 않은 교사는 아이들을 애정으로 보살필 수 없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자유로운 학교는 질서와 체계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른의 편의를 우선으로 고려하며, 어른의 관점으로 아이들에게 말을 듣지 않는다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신주현 교장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다. 지금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는 통제가 아니라 허용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통제하는 교육, 획일화된 교육으로는 새로운 생각을 키울 수 없지요. 놀이할 때 아이들은 발랄하고 엉뚱한 생각을 떠올립니다. 정답을 말하라는 게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말하도록 허용하고 칭찬하는 것이 놀이수업의 핵심이고, 교육 혁신의 바탕이 되는 허용적 태도입니다.”